[기고] 고추 농사서 배우는 당무유용(當無有用) 의미

농협 중앙교육원 교수 정준호
온라인팀
news@ecoday.kr | 2020-09-22 08:24:25
▲농협 중앙교육원 교수 정준호

[환경데일리 온라인팀]부처님 오신 날을 시작으로 어린이날까지 꿈같이 달콤한 긴 연휴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기 위해 직장과 집을 오가는 답답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자연을 벗하며, 가족들과 단란한 휴가를 즐긴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가족들과 함께 철원에 다녀왔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모내기를 마쳤고, 밭에도 여러 농작물들이 5월의 햇살을 받아 쑥쑥 자라고 있었다. 손에 익지 않아 어설픈 솜씨지만, 비닐하우스 안에 고랑을 만들고, 비닐을 덮고, 간격을 맞춰 고추를 심고, 양옆으로 지주대를 세우고, 칸칸이 그물망을 설치하는 일을 했다. 잠깐 보탠 일손도 힘이 드는데, 여름을 지나 가을이 깊어 농사를 마칠 때까지 수고하실 어머니의 고추보다 매운 고추 농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가볍지 않다.

하우스 고추는 노지 고추에 비하면 엄청나게 크다. 마치 푸른 숲 같다. 사람 키보다 크게 자라는 고춧대에 주렁주렁 고추가 열리고, 태양처럼 붉은 색깔로 익어가면, 여름철 무더위 아랑곳없이 새벽부터 땅거미 지는 초저녁까지 고추 숲을 헤치며 잘 익은 고추를 따야 한다.


도회지에 나가 산다는 이유로 한 두 번의 고추 수확을 돕게 되는데, 힘들게 고추를 따고 나서 돌아보면 벌써 붉은색을 띠며 익어가는 고추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고추 고랑으로 돌아가 고추를 따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된다. 가을이 되어 고춧대를 뽑아낼 때까지, 고추 수확은 무한궤도처럼 계속된다. 그렇게 따온 고추를 마당에 널어 햇살에 말리고, 방앗간에서 빻아 놓고 나면 혈액처럼 붉은 고춧가루가 한 해 농사의 보람을 잠시나마 선물해 준다.

노자 11장에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이라는 구절이 있다. 해석을 인용하자면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는 내용이다. 그릇이 비어있음으로 인해 쓰임이 생기는 것과 같이, 우리 식생활에 필수품인 고춧가루는 어느 시골 마을, 어진 농부가 한 해 동안 수고한 덕분에, 고추보다 매운 고추농사 덕분에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어디 고춧가루뿐이랴. 오이 한 개, 사과 한 알, 감자 한 알, 쌀 한 톨에도 농부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와 땀이 담겨 있다. 쓰임을 만들어 주는 비어있음의 가치를 읽는 명징한 눈을 가진 사람을 지혜롭다고 부른다면, 농산물 하나하나에 담긴 농부들의 수고를 읽는 사람들이야말로, 지혜롭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하겠다.

요즘 농촌은 이른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다. 생활 속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도 농촌의 일손을 돕고, 농사일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좋은 때다. 가장 좋은 학습은 직접 체험하며 배우고, 배운 것을 삶의 현장에서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학습(學習)의 한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배운 것을 실천하는 과정이 바로 '학습'이다. 논어의 첫 구절이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인데, 필자는 배움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구로 새기고 있다. 다가오는 추석연휴나 주말에, 가까운 농촌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농작물이라는 생명을 심고 가꾸는 즐거움과 땀의 소중한 가치를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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