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아닌 천연 방충제"... 도심 속 박쥐, 건강한 생태계의 신호탄

고용철 기자

korocamia@naver.com | 2026-04-20 04:44:30

- 살충제 대신하는 ‘밤의 파수꾼’, 하룻밤에 나방 6만 마리 포식
- 도심 녹지율 40% 확보 시 박쥐 활동 극대화, 생물 다양성 지표로 활용
- 전문가들 “막연한 공포심 버려야... 인수공통감염병 위험 낮지만 접촉은 피해야”


(C) ecoticias.com


해 질 녘 도심의 하늘에서 빠르게 가로지르는 검은 그림자를 마주할 때, 많은 시민은 본능적인 거부감이나 공포를 느끼곤 한다. 그러나 과학계의 시선은 전혀 다르다. 생태학자들은 도심 주거지 인근에서 박쥐가 목격되는 것을 매우 긍정적인 신호이자, 인간에게 이로운 ‘천연 해충 방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고 있다.

'살충제 없는 방역', 박쥐 한 개체가 미치는 놀라운 영향력

최근 스페인 도냐나 생물학 기지(CSIC)와 바스크대학교(UPV/EHU) 연구진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박쥐는 상상 이상의 해충 조절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연구진이 카디스 지역의 한 동굴 박쥐 군집을 대상으로 DNA 분석 기반의 먹이 사슬(metabarcoding)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들이 섭취하는 160여 종의 절지동물 중 무려 39종이 농작물이나 산림에 피해를 주는 해충인 것으로 밝혀졌다.

수치로 환산한 결과는 더욱 경이롭다. 해당 박쥐 군집은 5월부터 10월까지 약 1,610kg에 달하는 해충을 잡아먹었다. 특히 산림 파괴의 주범인 소나무행렬나방(processionary moth)의 경우, 활동 정점기에 하룻밤에만 약 6만 마리, 한 시즌 동안 무려 173만 마리를 포식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는 화학 살충제 사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수치로, 박쥐가 ‘친환경 방역관’으로서 독보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도심의 골칫거리인 일반 집모기(Culex pipiens) 역시 박쥐의 주요 먹이 중 하나다. 모기는 웨스트나일 바이러스 등 치명적인 질병의 매개체가 되기도 하는데, 박쥐의 존재는 이러한 질병 확산 위험을 자연적으로 억제하는 완충 지대 역할을 한다.

도시 생태계의 건강 상태를 보여주는 '녹색 지표'

박쥐의 등장은 단순히 먹이 사슬의 문제를 넘어 해당 지역의 녹지 인프라 수준을 반영한다. 마드리드 자치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도심 내 녹지 비율이 약 40%에 도달할 때 박쥐의 종 다양성과 활동량이 최대치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쥐는 먹이 활동을 위해 가로수, 공원, 습지 등 일종의 ‘녹색 통로’가 필요하다. 따라서 집 근처에서 박쥐가 자주 목격된다면, 이는 해당 주거 지역이 단순한 콘크리트 숲이 아니라 동식물이 공존할 수 있는 우수한 생태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방증이다. 박쥐는 스스로를 드러냄으로써 도시가 얼마나 건강하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셈이다.

근거 없는 미신과 실질적인 공존 수칙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쥐에 대한 오해는 여전하다. 유럽과 한국에 서식하는 대부분의 박쥐는 식충성으로, 가축이나 사람의 피를 빠는 ‘흡혈 박쥐’는 중남미 일부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다. 또한 박쥐가 사람의 머리카락에 엉킨다는 설 역시 근거가 없다. 박쥐의 초음파 에코 로케이션(Echolocation) 시스템은 매우 정교하여 비행 중 장애물을 완벽하게 회피한다.

질병에 대한 우려도 과장된 측면이 있다. 물론 박쥐가 바이러스를 보유할 가능성이 있으나, 전문가들은 직접적인 접촉만 피한다면 위험성이 극히 낮다고 조언한다. 스페인 박쥐 보존 연구 협회(SECEMU)는 “박쥐는 공격적인 동물이 아니며, 허가 없이 손으로 만지는 행위만 삼가면 된다”고 강조한다.

만약 박쥐가 실수로 실내에 들어왔을 때는 전등을 끄고 창문을 열어둔 채 방 문을 닫아두는 것이 가장 좋다. 야행성인 박쥐가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만약 부상당한 박쥐를 발견했다면 직접 만지지 말고 야생동물 구조센터 등 전문 기관에 연락해야 한다.

법적 보호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과제

현재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전역과 한국 등 많은 국가에서 박쥐는 법적 보호종으로 지정되어 있다. 박쥐의 서식지를 파괴하거나 개체를 포획하는 행위는 법적 처벌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들의 생존 환경은 여전히 위태롭다. 최근 탄소 중립을 위한 풍력 발전소 건설이 활발해지면서, 비행 중인 박쥐가 풍력 터빈에 충돌하거나 기압 차로 인해 폐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환경 전문가들은 “에너지 전환은 필수적이지만, 박쥐와 같은 핵심 종의 이동 경로를 고려한 세밀한 환경 영향 평가와 교정 조치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결국 박쥐와의 공존은 인간의 보건과 경제적 이득, 그리고 생태적 풍요로움을 모두 잡는 길이다. 밤하늘을 수놓는 소리 없는 사냥꾼, 박쥐를 향한 시선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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