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밑의 시한폭탄: 제2차 세계대전 '화학무기' 부식 가속화, 발트해 생태계 비상

고용철 기자

korocamia@naver.com | 2026-03-09 05:42:39

- 6만 톤 이상의 화학무기와 수백만 톤의 탄약 방치
- 해수 온도 상승으로 금속 외피 부식 속도 빨라져 독성 물질 유출
- 먹이사슬 타고 어패류 축적 확인… 에너지 전환 사업에도 걸림돌


(C) ecoticias.com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80년이 넘었지만, 당시 바다에 투기 된 거대한 규모의 '살상용 유산'이 오늘날 인류와 해양 생태계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발트해 해저에 잠긴 수만 톤의 화학 탄약이 임계점에 도달한 부식 속도로 인해 파손되기 시작하면서, 유럽 각국에 비상이 걸렸다.

잠들지 않은 유산: 발트해의 거대한 무기 창고
최근 헬싱키 위원회(HELCOM)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발트해 바닥에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직후 폐기된 약 4만~6만 톤의 화학무기가 잠겨 있다. 여기에 재래식 폭탄, 기뢰, 포탄 등 일반 탄약까지 합치면 그 규모는 가공할 수준이다. 독일 영해 내 발트해에만 약 30만 톤, 북해까지 포함하면 150만 톤 이상의 탄약이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과거 전문가들은 바닷물이 이러한 독성 물질을 자연적으로 중화하거나 차단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미하우 추브(Michał Czub) 해양생물학자를 비롯한 현대 과학자들은 이러한 낙관론이 오판이었음을 지적한다. 수십 년간 지속된 해수 노출로 인해 무기들의 금속 외피가 부식되었고, 그 틈으로 폭발물 성분과 중금속, 화학 작용제가 본격적으로 유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독성 물질의 역습: 먹이사슬 오염과 변종 독성
환경 과학계가 특히 우려하는 지점은 유출된 물질이 해양 생물 체내에 축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5년 'Chemosphere'지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발트해 남서부 해수와 퇴적물에서 TNT, RDX, DNB와 같은 폭발성 화합물이 광범위하게 검출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화학무기 분해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종 독성'이다. 비소(As) 계열 작용제나 이페리트(머스터드 가스)가 해수와 반응하여 분해될 때, 일부 부산물은 원래의 물질보다 더 강한 독성을 띠기도 한다. 실제로 킬(Kiel)만 인근의 홍합과 저서어류를 조사한 결과, TNT 대사 물질이 검출되었으며 실험실 분석에서 유전 독성(Genotoxicity) 반응이 확인되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어업 종사자와 수산물 소비자에게 잠재적인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기후 변화가 앞당긴 위기: 따뜻해진 바다의 역설
최근 가속화된 해수 온도 상승과 빈번해진 폭풍은 이 문제를 '미래의 과제'에서 '현재의 위기'로 전환시켰다. 독일 GEOMAR 헬름홀츠 해양연구소는 수온 상승이 금속의 부식 반응을 촉진하고, 폭풍으로 인한 해저 교란이 퇴적물 속에 묻혀 있던 수은과 폭발물 성분의 확산을 돕는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환경적 위협은 경제적 차질로도 이어진다. 유럽이 추진 중인 '청정에너지 전환'의 핵심인 해상풍력발전소 건설과 해저 케이블 부설 작업이 이 탄약 매립지들과 겹치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해상풍력 사업 부지 내 화학무기 존재 여부는 공사 지연과 비용 급증의 결정적 원인이 되고 있다.

국제사회의 대응과 한계: 거대한 비용의 벽
현재 독일 정부는 약 1억 유로(한화 약 1,4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탄약 수거를 위한 부유식 플랫폼 개발과 시범 사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국제법적 현실은 녹록지 않다. 런던 협약과 헬싱키 협약은 신규 폐기를 금지할 뿐, 과거에 버려진 '구식 무기'에 대한 정화 책임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상황이 단순히 발트해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 지역의 불발탄과 폐기 병기들이 미래에 어떤 재앙으로 돌아올지 보여주는 '거대한 실험실'이라는 것이다.

과학계는 당장의 패닉은 경계하면서도 국가 차원의 투명한 정보 공개와 체계적인 수거 계획 수립을 촉구하고 있다.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해양학 연구소는 "부식의 시계는 정치적 결단과 자금 조달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며 해양 주권 국가들의 초국가적 협력을 강조했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 환경데일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