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대신 복지를”... 기후 위기 돌파구로 부상한 ‘포스트 성장’ 모델

고용철 기자

korocamia@naver.com | 2026-03-14 08:46:10

경제 성장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의 기본 욕구와 생태적 한계에 집중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 발표. ICTA-UAB 등 국제 공동 연구진, '네이처 기후 변화'에 새로운 경제 로드맵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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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직면한 기후 변화의 위기 속에서 기존의 ‘경제 성장’ 중심 패러다임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스페인 바르셀로나 자치대 환경과학기술연구소(ICTA-UAB)를 비롯해 스위스 로잔 대학교,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 소속 국제 공동 연구진은 국제 학술지 '네이처 기후 변화(Nature Climate Change)'를 통해, 부유한 국가들이 지속적인 GDP 성장에 매달리지 않고도 시민들의 삶의 질을 보장하면서 탄소 배출을 급격히 줄일 수 있는 ‘포스트 성장(Post-growth)’ 로드맵을 발표했다.

성장의 역설: 왜 기존 기후 대책은 실패하는가
현행 각국 정부의 기후 정책은 대개 경제 성장을 유지하면서 기술 혁신을 통해 탄소 배출을 줄이는 ‘녹색 성장’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진은 이러한 방식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지적한다. 부유한 경제권이 생산과 소비 규모를 계속해서 확장하는 한, 기술적 효율 개선만으로는 기후 변화 속도를 따라잡기 역부족이라는 분석이다. 결과적으로 파리 협정의 목표 달성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으며, 이는 인류 사회와 생태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연구의 주저자인 알료샤 슬라메르샤크(Aljoša Slameršak) 박사는 "포스트 성장은 단순히 현 경제 시스템 내에서 생산량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그는 "사회적·생태적으로 유해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은 과감히 줄이고, 인간의 필요와 생태적 목적에 부합하는 생산 활동은 오히려 늘리는 '생산의 질적 전환'과 '공정한 분배'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지표'가 아닌 '복지' 중심의 경제 체제
포스트 성장 모델의 핵심은 경제 성과를 측정하는 지표를 GDP(국내총생산)와 같은 화폐 가치 중심에서 '인간의 기본적 욕구 충족'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연구진은 주거, 의료, 교육, 영양 공급 등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 요소들이 얼마나 잘 제공되고 있는지를 복지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모델에 따르면 부유한 국가들은 불필요한 과잉 소비를 억제하고 자원을 보다 평등하게 분배함으로써, 적은 자원 소비로도 높은 수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공동 저자인 야르모 키크스트라(Jarmo S. Kikstra) 연구원은 "기존 연구들을 종합해보면, 전 세계적으로 현재 소비되는 에너지와 자원의 절반 미만으로도 인류 전체의 기본적 욕구를 보편적으로 충족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불평등 해소와 생태적 한계 준수
연구진은 특히 '북반구(Global North)'와 '남반구(Global South)' 사이의 자원 사용 불균형을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부유한 국가들의 과도한 자원 점유를 줄이고, 전 지구적 자원 소비 수준이 생태적 한계 내에서 수렴하도록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단순한 수요 감축뿐만 아니라, 저탄소 기술에 대한 전략적 투자와 부의 재분배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보고서는 명시했다.

로잔 대학교의 조엘 밀워드-홉킨스(Joel Millward-Hopkins) 교수는 "포스트 성장은 모든 이에게 품격 있는 생활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경제를 재구조화하는 과정"이라며, "지구의 한계 내에서 필수적이지 않은 추가 소비를 제한하는 대신, 극심한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전환의 장벽: 정치적 결단과 모델링의 과제
물론 이러한 체제 전환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연구진은 기존 경제 시스템에서 이득을 취해온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저항과 사회·제도적 구조의 관성을 주요 장벽으로 꼽았다. 또한, 현재의 경제 예측 모델들이 포스트 성장의 복잡한 변수들을 충분히 통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진은 포스트 성장 모델이 기존의 성장 중심 시나리오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민주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장 중심 시나리오들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대규모 탄소 제거 기술'에 의존하는 도박을 걸고 있는 반면, 포스트 성장은 시민들의 민주적 합의와 사회적 동원을 통해 물리적으로 실현 가능한 변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연구는 기후 위기 시대의 경제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무한한 성장의 환상에서 깨어나, 한정된 지구 자원 안에서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절제와 공유의 경제'로의 이행이 인류의 생존을 결정지을 핵심 열쇠가 될 전망이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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