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 패널과 벌의 공존, '친환경'의 역설인가 새로운 기회인가?
고용철 기자
korocamia@naver.com | 2026-03-20 03:01:27
-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의 생물다양성 보존 대책 시급
(C) National Geographic
최근 신재생 에너지 확대를 위한 태양광 발전 시설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인프라가 생태계의 핵심인 벌(꿀벌 및 야생벌)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라 발표되며 과학계와 에너지 산업계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인류의 탄소 중립을 위한 '착한 에너지'가 역설적으로 자연의 화분 매개자인 벌에게는 치명적인 환경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자기장, 벌의 '생체 시계'를 흔들다
칠레 탈카 대학교(University of Talca)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공동 연구진이 최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고압 송전선과 통신 안테나 인근에서 활동하는 벌들은 심각한 생리적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활성화된 전력선 근처의 전자기장(EMF) 강도가 일반 지역보다 약 10배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환경에 노출된 벌들은 내부 온도가 상승하고, 열충격 단백질(Heat Shock Proteins) 및 산화 스트레스와 관련된 생화학적 지표가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전자기장은 벌의 행동, 자기장 방향 감각, 면역 체계와 관련된 유전자 발현까지 변화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스트레스는 실질적인 생태계 서비스 저하로 이어진다. 실험 결과, 송전탑 인근에 위치한 '캘리포니아 양귀비'는 벌의 방문 횟수가 현저히 적었으며, 결과적으로 원거리 식물에 비해 종자 생산량이 크게 감소했다. 이는 전자기장이 벌의 항법 시스템을 방해하여 수분(Pollination) 능력을 떨어뜨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태양광 발전소, '그늘'에 가려진 생태계 불균형
태양광 패널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대규모 발전 단지의 조성 방식에 있다. 프랑스 남부 20개 태양광 발전소를 대상으로 진행된 '생물 보존(Biological Conservation)'지의 연구에 따르면, 패널 아래의 생태계는 주변 지역과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조사 결과, 태양광 패널 아래 구역은 개활지에 비해 화분 매개 곤충의 개체 수가 약 76% 적었으며, 수분 상호작용은 86%나 급감했다. 이는 패널이 만드는 거대한 그늘로 인해 일조량이 부족해지면서 식생이 단순화되고 꽃의 밀도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즉, 벌들에게 제공될 '먹이 자원' 자체가 사라진 셈이다.
또한, 발전소 부지 관리를 위해 시행되는 집약적 방목이나 무분별한 제초 작업은 벌들의 서식지를 더욱 황폐화하는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포기"가 아닌 "공존"을 위한 설계
전문가들은 이러한 연구 결과가 태양광 발전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후 위기로 인한 폭염과 가뭄 역시 벌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한 적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어떻게 설치하고 관리하느냐'에 있다.
최근 유럽의 일부 에너지 기업들은 태양광 발전소 부지에 자생 야생화 단지를 조성하고 인공 벌통을 설치하는 등 '생물다양성 친화적 태양광(Solar-Sharing)' 모델을 도입하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대안이 유효한 것으로 나타났다.
식생 관리의 전환: 자갈이나 콘크리트 대신 야생화 초지를 조성하고, 기계적인 예초 대신 완만한 수준의 관리를 시행한다.
전기 설비의 격리: 인버터나 고압 송전 설비 등 강한 전자기장이 발생하는 장치를 생태 통로에서 가급적 멀리 배치한다.
가정용 시스템의 안전성: 가정용 루프탑 태양광의 경우 인버터와의 거리만 적절히 유지한다면 벌에게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오히려 정원에 밀원식물을 심는 노력이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결국 탄소 중립을 향한 여정은 단순히 '메가와트(MW)'를 늘리는 숫자의 싸움이 아니라, 기술이 자연의 리듬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동반해야 한다. 과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정교한 설계만이 태양광 패널과 벌이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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