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전선에 타버린 국가 상징"…코스타리카 야생동물 병원의 비명
고용철 기자
korocamia@naver.com | 2026-03-04 14:18:21
- 전기사고·로드킬 등 인간 활동이 주원인… “보호 인식 전환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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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의 생물 다양성을 상징하는 동물인 나무늘보 '산티(Santi)'의 몸에는 인간 문명이 남긴 참혹한 흉터가 가득하다. 어린 나무늘보인 산티는 최근 전신주에 접촉되어 머리와 사지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채 구조되었다. 산티의 모습은 단순히 부상당한 개체 하나를 넘어, '생태 강국'이라 자부하는 코스타리카가 직면한 인간 활동과 야생의 위태로운 충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척도가 되고 있다.
전선에 걸린 국가 상징, 연간 3,000마리의 조용한 비명
2021년 코스타리카의 국가 상징물로 지정된 나무늘보가 역설적으로 인간이 만든 인프라에 의해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현재 코스타리카 내에서 유일하게 야생동물 전용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레스카테 야생동물 구조센터(Rescate Wildlife Rescue Center)'는 밀려드는 부상 동물들로 인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이 센터에 따르면 매년 약 3,000마리의 야생동물이 인간 활동으로 인한 사고로 입원한다. 부상의 원인은 참혹할 정도로 정형화되어 있다. 전신주 접촉으로 인한 감전, 도로 횡단 중 발생하는 로드킬(교통사고), 그리고 불법 포획 후 반려동물로 기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학대와 부적응 등이다.
병원의 수술대 위에는 거북이, 설치류, 소형 조류부터 푸마와 재규어 같은 대형 맹수들까지 코스타리카 생태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종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인간의 개발이 자연에 입힌 상처를 치유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생태계 파괴의 현실을 기록하는 기록소이기도 하다.
"진짜 문제는 개발로 인한 서식지 파편화"
레스카테 센터의 전담 수의사인 이사벨 하그나우어(Isabel Hagnauer) 박사는 현재의 상황을 심각한 '인재(人災)'로 규정한다. 그는 "코스타리카는 생물 다양성이 매우 풍부한 국가이지만, 센터에 입원하는 동물 대다수가 '인위적 요인', 즉 인간의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비극"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하그나우어 박사는 서식지의 파편화를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았다. 인간의 도로와 건축물이 숲을 잘게 쪼개면서 동물들이 이동 중에 차에 치이거나, 나무 대신 전신주를 타다가 감전되는 사고가 빈번해졌다는 분석이다. 또한, 야생동물을 개인의 소유물로 삼으려는 불법 반려동물 문화가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는 점도 큰 문제로 지목된다.
그는 "단순히 구조 시설을 늘리는 것이 해답이 아니다"라며 "야생동물은 인간의 곁이 아닌 숲에 있어야 한다는 국민적 인식의 전환과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국가적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돌아가지 못하는 자들의 안식처, '생존' 그 너머를 위하여
구조된 모든 동물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선에 감전되어 신체 일부를 소실했거나, 인간의 손에 길들어 야생성을 잃어버린 동물들은 숲으로 돌아가는 순간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개체들은 센터 내의 '생식처(Santuario)'로 옮겨져 여생을 보낸다. 이곳에는 재규어, 오셀롯, 금강앵무(Lapa), 각종 유인원 등 약 1,000여 마리의 동물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야생동물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환경 교육의 전령사'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센터는 멸종위기에 처한 금강앵무(Ara macao)의 복원 사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신체적 결함으로 방사가 불가능한 개체들을 교배시켜 태어난 새끼들을 엄격한 적응 훈련을 거쳐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파괴한 생태계의 사슬을 다시 잇기 위한 고군분투다.
'동물원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의 진정한 시험대
코스타리카는 지난 2024년 5월 11일, 국가가 운영하던 마지막 공립 동물원들을 폐쇄하는 역사적인 결단을 내렸다. 전시와 구금 위주의 동물원 문화를 종식시키고, 야생동물은 자연 그대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당시 동물원에 있던 개체들은 모두 환경적 기준을 충족하는 레스카테와 같은 전문 구조 센터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동물원을 없애는 선언적 의미보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공존의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전문가들은 서식지 보호와 인프라 개선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폐쇄된 동물원의 자리를 포화 상태인 야생동물 병원이 대신하게 될 뿐이라고 경고한다.
산티와 같은 희생자가 줄어들기 위해서는 전력망의 절연 조치 강화, 생태 통로 확충, 그리고 야생동물 거래에 대한 엄격한 법 집행이 수반되어야 한다. 코스타리카의 야생동물 병원에서 들리는 비명은, 인간의 편리함이 자연의 생존을 앞지를 때 발생하는 '청구서'와도 같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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