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석유’에 잠식된 생명의 땅, 아르헨티나 로스 안데스 보호구역의 비명

고용철 기자

korocamia@naver.com | 2026-03-31 07:01:38

리튬 채굴 열풍 속 방치된 보호구역… 생물 다양성 파괴와 수자원 고갈 위기 관리 계획 승인되고도 8년째 사장, 1만 4천㎢ 광활한 대지에 감시원은 단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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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인 에너지 전환의 파고 속에서 ‘4차 산업혁명의 쌀’이라 불리는 리튬을 향한 갈구는 안데스산맥의 고요한 침묵마저 깨뜨리고 있다. 아르헨티나 북서부 살타주에 위치한 ‘로스 안데스 야생동물 보호구역(Reserva Natural de Fauna Silvestre Los Andes)’은 현재 보존과 개발이라는 양극단의 가치가 충돌하는 가장 치열한 현장이자, 공공 관리의 부재가 낳은 비극적인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거대국가 국토 맞먹는 면적, 관리는 ‘전무’
로스 안데스 보호구역은 살타주 전체 보호지역 면적의 80%를 차지하는 핵심 생태 거점이다. 그 면적만 1만 4,000㎢에 달하며, 이는 레바논이나 몬테네그로 같은 독립 국가의 전체 국토 면적보다도 넓다. 그러나 이 광활한 대지를 지키는 인력은 단 한 명의 관리 요원뿐이다. 장비와 지원 인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사실상 보호구역은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방치 상태에 놓여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제도적 장치의 부재다. 지난 2017년부터 2018년 사이, 과학계의 참여와 국제기구의 지원을 통해 구체적인 ‘관리 계획’이 수립되었고 공식 승인까지 마쳤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계획은 서류상에만 존재할 뿐 단 한 차례도 실행되지 않았다. 미주개발은행(IDB)으로부터 약 400만 달러(한화 약 54억 원)의 국제 금융 지원까지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 당국의 태만으로 인해 현장의 생태계는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었다.

리튬 채굴이 앗아간 ‘사막의 오아시스’
이 지역의 생태적 가치는 살라르(Salar, 소금호수)와 석호, 아로요(Arroyo, 건천)가 형성하는 독특한 수계 네트워크에 있다. 건조한 고산 지대에서 이들 수자원은 야생동물과 지역 공동체에 생명줄과 같은 ‘오아시스’ 역할을 한다. 하지만 리튬 추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양의 용수 사용은 이 취약한 수문학적 균형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리튬 광산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인근 석호의 수위는 급격히 낮아졌고, 이는 곧바로 생물 다양성의 위기로 이어졌다. 안데스 플라밍고와 비쿠냐 등 멸종 위기종들의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조사에 따르면, 과거 수백 개의 둥지가 발견되던 플라밍고 번식지는 최근 채굴 활동의 여파로 단 10여 개 남짓으로 급감하거나 아예 사라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광산 개발에 따른 인적 유입과 폐기물 발생은 상위 포식자들의 생태계를 교란하며 연쇄적인 멸종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탄소 중립의 역설, ‘녹색 약탈’인가 ‘지속 가능한 발전’인가
로스 안데스 보호구역의 비극은 인류가 직면한 ‘탄소 중립’의 역설을 보여준다.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리튬을 채굴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희귀한 고산 생태계와 탄소 흡수원인 소금호수가 파괴되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폐쇄형 분지(Endorheic basin) 구조를 가진 이 지역의 환경 파괴는 한 번 시작되면 회복이 불가능한 가역적 피해를 남긴다. 미주개발은행이 제안했던 60여 개의 실행 과제—구역화(Zoning)를 통한 엄격 보존, 재생 에너지 도입, 지역 주민을 위한 지속 가능한 축산 지원 등—가 조속히 시행되지 않는다면, 로스 안데스는 리튬 채굴이 할퀴고 간 거대한 폐허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현지 환경 전문가 이마놀 R.H.는 “전 세계가 리튬이라는 자원의 전략적 가치에만 매몰되어, 그 자원을 품고 있는 대지의 생명력에는 눈을 감고 있다”며 “관리 계획의 즉각적인 이행과 공공 자원의 투입만이 이 비극적 행보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2026년 봄, 로스 안데스의 소금 호수는 붉은 플라밍고의 날갯짓 대신 거대한 굴착기의 굉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 ‘하얀 석유’가 안데스의 순수한 생태계를 집어삼키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국제사회와 아르헨티나 정부의 결단이 절실한 시점이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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