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위기 ‘자모라노 레오네스’ 당나귀의 재탄생: 전통의 굴레를 벗고 현대적 경제 가치를 입다
고용철 기자
korocamia@naver.com | 2026-03-23 19:08:39
- 치즈·화장품 원료인 유즙 생산부터 산불 예방 '천연 제초기' 역할까지
- 사육 농가 고령화와 세대교체 부재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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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비테로(스페인 자모라) — 과거 농경 사회의 상징이자 충직한 일꾼이었던 스페인의 토착종 ‘자모라노 레오네스’ 당나귀가 멸종의 문턱에서 극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단순한 유전적 보존을 넘어, 21세기 농촌 경제의 핵심 자산이자 생태계의 수호자로 거듭나기 위한 이들의 행보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시름방는 스페인 농촌 사회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1,000마리의 기적’에서 ‘1,700마리의 희망’으로
지난 주말, 스페인 자모라 주의 산 비테로(San Vitero)에서 개최된 ‘제26회 자모라노 레오네스 당나귀 박람회’는 이 특별한 품종이 직면한 현실과 미래를 동시에 보여준 현장이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가축 혈통 대장에 등록된 개체 수가 1,000마리 미만으로 떨어지며 절멸의 위기에 처했던 이 품종은 현재 약 1,700마리까지 개체 수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수치상의 회복이 완전한 생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농촌의 공동화와 농축산업의 기계화는 당나귀의 전통적인 역할을 앗아갔다. 이에 사육 농가와 관련 단체들은 “경제적 자립 없는 보존은 지속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당나귀의 역할을 다각화하는 ‘전략적 혁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산불 예방의 ‘천연 파수꾼’이자 생태계 조절자
가장 주목받는 변신은 ‘환경 관리자’로서의 역할이다. 기후 위기로 인해 매년 수만 헥타르의 산림이 소실되는 스페인에서 자모라노 레오네스 당나귀는 비용 효율적인 ‘천연 제초기’로 투입되고 있다. 이들은 산림 내 관목과 덤불을 뜯어 먹어 가연성 바이오매스를 조절함으로써 산불 확산을 방지하는 데 기여한다.
이는 고가의 장비와 인력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으로 평가받으며, 산림 관리 비용 절감이라는 공익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초식 동물로서 토착 식생의 균형을 맞추고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는 생태적 보루 역할을 수행하며 지역 경관의 일부로 녹아들고 있다.
‘화이트 골드’ 당나귀 우유와 코스메틱 시장의 개척
경제적 자립의 또 다른 축은 당나귀 우유 생산이다. 소화 흡수율이 높고 모유와 성분이 유사한 것으로 알려진 당나귀 우유는 고부가가치 식품 및 화장품 원료로 각광받고 있다. 현재 비누, 크림 등 기능성 화장품으로 가공되어 시장에 출시되고 있으며, 이는 농가의 새로운 소득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만, 한정된 생산량과 체계적인 유통망 부재는 여전한 과제다. 이에 자모라노 당나귀 사육자 협회(ASZAL)를 중심으로 생산자 협동조합 결성이 추진되고 있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브랜드 가치를 높여 당나귀 우유를 지역 특산물로서의 ‘화이트 골드’로 육성하겠다는 전략이다.
고령화라는 거대한 장벽과 세대교체의 필요성
이러한 혁신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약점은 존재한다. 바로 ‘세대교체의 부재’다. ASZAL의 빅토르 카사스(Víctor Casas) 회장은 “개체 수는 늘었지만 사육 농가의 수는 줄어들고 있으며, 무엇보다 농장주들의 고령화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젊은 층의 유입 없이는 현재의 성과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나귀의 뛰어난 사교성과 온순한 성품을 활용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도 제시되고 있다. 인간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당나귀의 특성을 이용한 ‘동물 매개 치료(Animal-Assisted Therapy)’, 농촌 체험 관광, 환경 교육 프로그램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청년 창업가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영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전통적 유산에서 현대적 자원으로의 전환
이번 박람회에서 진행된 유전적 개량 전시와 공공 경매는 품종의 질적 향상과 경제적 가치 증명을 위한 노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전문가들은 자모라노 레오네스 당나귀의 미래가 ‘전통적인 짐꾼’에서 ‘현대적 다목적 자원’으로의 완벽한 전환에 달려 있다고 입을 모은다.
결국, 이 귀중한 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단순히 한 종을 살리는 일을 넘어, 스페인 농촌의 정체성을 지키고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을 찾는 과정이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사회적 관심, 그리고 혁신적인 상업화 전략이 맞물릴 때만이 이 ‘검은 털의 조용한 동반자’들이 산 비테로의 들판을 오래도록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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