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기후 리더십’ 실종되나… 개발도상국 지원 예산 대폭 삭감 파문

고용철 기자 / 2026-03-03 04:50:26
- 116억 파운드 약속에도 실질적 자연보호 프로그램 곳곳서 ‘도끼질’
- ‘블루 플래닛 펀드’ 등 핵심 사업 존폐 위기… 회계 편법 통한 ‘수치 부풀리기’ 의혹
- 85개 시민단체 연명 서한 전달, “화석 연료 기업 과세로 재원 마련해야” 촉구


(C) Global Citizen


영국의 국제적 기후 약속이 위기에 처했다. 영국 정부가 개발도상국의 기후 위기 대응과 생물다양성 보호를 위해 약속했던 수억 파운드 규모의 지원 프로그램들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제적인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이번 삭감은 ‘기후 선도국’을 자처해온 영국의 대외적 이미지와 정면으로 배치될 뿐만 아니라, 투명하지 못한 회계 방식을 통해 실질적인 지원을 줄이려는 ‘꼼수’라는 비판이 거세다.

 
사라지는 ‘아텐보로의 약속’… 핵심 펀드 무더기 삭감
환경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영국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해온 주요 환경 보호 기금들이 소리 소문 없이 칼질을 당하고 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5억 파운드(약 8,500억 원) 규모의 ‘블루 플래닛 펀드(Blue Planet Fund)’의 위기다. 이 펀드는 세계적인 자연 다큐멘터리의 거장 데이비드 아텐보로 경의 ‘블루 플래닛’ 시리즈를 통해 해양 오염의 심각성이 공론화되자, 전 세계 해양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상징적인 기금이다. 그러나 아텐보로 경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올해, 정부는 이 프로그램의 지속 여부를 불투명하게 처리하며 사실상 폐지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빈곤 지역의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1억 파운드 규모의 ‘생물다양성 경관 기금(Biodiverse Landscapes Fund)’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당초 6개 지역을 대상으로 설계되었으나, 현재는 단 2개 지역으로 축소 운영되고 있다. 이외에도 해양 적응 및 지속 가능한 전환 프로젝트인 ‘COAST’와 기후 전환 가속화 사업인 ‘PACT’ 등도 예산이 대폭 깎이며 사업 수행에 차질을 빚고 있다.

 
투명성 결여된 ‘불투명 행정’… 회계 편법 논란까지
전문가들은 이번 예산 삭감이 더욱 고약한 이유는 정부의 ‘불투명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영국 외무·연방·개발부(FCDO)는 개별 기금의 세부 지출 내역 공개를 거부하고 있으며, 2020년 이후 프로젝트 단위의 상세 데이터는 전무한 실정이다.

특히 논란이 되는 지점은 ‘116억 파운드(약 20조 원) 지원 약속’의 이행 방식이다. 영국 정부는 2026년 3월까지 이 금액을 국제 기후 재원(ICF)으로 지출하겠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가디언의 조사 결과, 정부는 최빈국에 대한 일반 원조 예산의 30%를 기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기후 재원’으로 간주하는 회계 방식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실질적인 기후 특화 프로그램 예산은 20억 파운드 이상 삭감하면서도, 서류상으로는 전체 목표 금액 116억 파운드를 달성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그린 워싱(Greenwashing)’ 행정을 펼치고 있다는 비판이다.

 
“미래를 담보로 한 근시안적 조치” 거센 반발
시민사회와 전문가 그룹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85개 시민사회 단체는 키어 스타머 총리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통해 “기후 금융 삭감은 기후 위기 최전선에 있는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자, 기후 리더십을 발휘하겠다는 정부의 공약 위반”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재원 마련의 대안으로 ‘오염자 부담 원칙’을 제시했다.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는 화석 연료 기업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고, 전용기 이용 등 부유층의 고탄소 소비에 ‘자주 비행하는 승객 분담금(Frequent Flyer Levy)’ 등을 도입하면 수십억 파운드의 재원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작년 영국 정보기관 수장들이 참여한 합동정보위원회(JIC) 보고서에 따르면, 아마존 열매 우림의 붕괴나 산호초 멸종 등 글로벌 생태계 위기는 영국의 국가 안보와 직결되며 식량 부족, 폭동,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기후 지원 삭감이 단순한 예산 절감을 넘어 영국의 장기적 안보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무너진 신뢰, 국제적 고립 자초하나
영국 정부 대변인은 “2026년 3월까지 116억 파운드 지원 약속을 이행할 궤도에 올라 있다”며 원론적인 답변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 활동가들은 자금이 ‘링거를 꽂듯’ 1년 단위로 쪼개져 지급되면서 현지 노동자들의 고용이 불안해지고 장기적인 프로젝트 계획이 불가능해졌다고 성토한다.

영국은 그동안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등에서 선진국의 책임을 강조하며 개발도상국의 기후 적응 지원을 선도해왔다. 하지만 이번 삭감 사태로 인해 국제 사회의 신뢰는 크게 실추될 것으로 보인다. 2035년까지 글로벌 기후 재원을 연간 3,000억 달러로 세 배 늘리기로 한 국제적 합의에 반하는 행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스타머 정부가 직면한 과제는 명확하다. 단순히 장부상의 수치를 맞추는 것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후 위기를 막고 생물다양성을 보존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재원’을 어떻게 확보하고 투명하게 집행할 것인가이다. 영국의 선택은 이제 더 이상 한 국가의 예산 문제를 넘어, 전 지구적 생태계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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