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수 과다 추출과 극단적 기후, 정치적 양극화와 결합해 안보 위기 심화
- "환경 리스크, 단순 재해 넘어 정부 신뢰도 하락 및 분쟁 경제 고착화의 동력"

(C) Yemen Policy Center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예멘 내전이 교착 상태에 머물러 있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멘의 안보를 뿌리째 흔드는 거대한 위협이 부상하고 있다. 바로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다. 최근 영국 정부의 예멘 사무국 네트워크(Yemen Office Network)의 요청으로 작성된 심층 연구 보고서는 예멘의 타이즈(Taizz)와 하드라마우트(Hadhramaut) 지역을 중심으로 기후 리스크가 어떻게 분쟁을 고착화하고 안보를 위협하는지 경고하고 나섰다.
정체된 전선 뒤에 숨겨진 '환경적 가속도'
이안 D. 퀵(Ian D. Quick)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집필한 이번 보고서에 따르면, 예멘의 분쟁은 더 이상 정치적·군사적 대립에만 머물지 않는다. 보고서는 타이즈와 하드라마우트라는 두 핵심 거버너레이트(주)를 분석하며, 환경적 위험 요소들이 분쟁의 구조적 동인과 결합하여 '나선형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 예멘의 갈등이 영토와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생존의 필수 자원인 물과 땅이 분쟁의 중심이 되고 있다. 보고서는 이를 '기후-분쟁-안보 넥서스(Nexus)'로 규정하며, 환경 위기가 단순히 자연재해에 그치지 않고 국가 시스템의 붕괴를 가속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4대 핵심 환경 리스크와 분쟁의 결합
보고서가 꼽은 예멘의 주요 환경 위협은 크게 네 가지다.
지하수의 무분별한 과다 추출: 예멘은 세계에서 가장 수자원이 부족한 국가 중 하나다.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은 수위 하락을 초래하고, 이는 지역 공동체 간의 '물 전쟁'으로 이어진다.
농식품 부문의 부적응(Maladaptation): 전통적 농업 방식이 기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식량 안보가 무너지고 있다. 이는 주민들이 무장 단체에 의존하게 만드는 경제적 토양을 제공한다.
수자원 및 토양의 황폐화: 내전으로 인한 관리 체계 부재 속에 물과 토양 오염이 심화하고 있다.
기상 이변 대응 실패: 홍수와 가뭄 등 극단적인 날씨 변화에 대한 방어 체계가 전무하여, 재난 발생 시마다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다.
기후 위기가 분쟁을 심화시키는 세 가지 경로
보고서는 특히 환경 리스크가 분쟁을 심화시키는 세 가지 구체적인 '분쟁 경로(Conflict Pathways)'를 제시했다.
첫째, '분쟁 경제의 고착화'다. 자원이 부족해질수록 이를 장악한 무장 세력이나 정치 파벌이 자원 배분권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이를 다시 무기 구입과 세력 확장에 사용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둘째, '천연자원 거버넌스의 안보화'다. 물과 토지 관리가 민생의 영역이 아닌 군사적 통제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자원 관리가 곧 권력의 수단이 되고 주민들의 기본권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셋째, '국제공인정부(IRG)의 정당성 하락'이다. 가뭄과 홍수 등 기후 재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력은 민심 이반을 초래한다. 이는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반군 세력이 득세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
국제사회의 대응: "단순 원조 넘어선 통합적 접근 필요"
보고서는 현재 예멘에서 진행 중인 기후 및 환경 프로그램들이 이러한 '분쟁 경로'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사각지대(Blind spots)'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향후 예멘 지원 정책을 수립할 때, 환경 리스크를 모든 포트폴리오의 주류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제언했다.
특히 '통합 안보 기금(Integrated Security Fund)' 메커니즘을 통해 기후-분쟁-안보의 접점에서 활동하는 파트너들을 지원하는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되었다. 이는 단순한 인도적 지원을 넘어, 환경 복원을 통한 평화 구축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멘의 집들은 전쟁뿐만 아니라 기후가 초래한 재해로도 파괴되고 있다. 타이즈의 무너진 가옥들은 예멘의 현재를 상징한다. 보고서의 저자들은 "예멘의 위기는 정체된 것이 아니라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매일 악화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기후 변화는 예멘 내전의 '조용한 가속기'다. 국제사회가 이 환경적 동인을 무시한 채 평화 협상에만 매달린다면, 설령 총성이 멈추더라도 물 한 바가지, 땅 한 뼘을 차지하기 위한 또 다른 분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제 예멘의 안정화는 기후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