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축 피해 줄이는 저비용·친환경 관리 모델로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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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거주지와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겹치면서 발생하는 갈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여우와 같은 포식자가 가축이나 양식장에 피해를 입히는 경우, 과거에는 주로 살상이나 포획 등의 강경책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최근 과학계는 동물의 심리와 후각을 이용해 스스로 먹이를 포기하게 만드는 ‘윤리적 관리법’에 주목하고 있다.
후각적 조건형성을 이용한 새로운 시도
최근 스페인 자원조사연구소(IREC)와 국립연구위원회(CSIC), 카스티야-라-만차 대학교(UCLM) 공동 연구팀은 여우를 대상으로 한 혁신적인 ‘후각 조건형성’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의 핵심은 무해하지만 야생에서 생소한 '바닐라 향'을 불쾌한 기억과 결합시켜 포식자의 행동을 수정하는 데 있다.
연구팀은 여우가 특정 먹이를 찾았을 때 느낄 고통스러운 경험을 바닐라 향과 연결하도록 설계했다. 이때 사용된 화학적 기피제는 고추의 매운 성분인 ‘캡사이신’이다. 캡사이신은 동물의 점막에 자극을 주어 일시적인 통증과 불편함을 유발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비살상 도구다.
실험 과정: 고통의 기억이 향기로 전이되다
연구팀은 야생 붉은여우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 8곳에 무인 카메라(트랩피킹)를 설치하고 총 226개의 고기 미끼를 살포했다. 실험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되었다.
-조합 단계: 미끼에 캡사이신과 바닐라 향을 동시에 첨가했다.
-관찰 단계: 여우가 미끼를 먹을 때 보인 반응을 분석했다.
-검증 단계: 이후 캡사이신을 제거하고 오직 '바닐라 향'만 묻힌 미끼를 배치했다.
카메라에 포착된 여우들의 반응은 극명했다. 캡사이신이 섞인 미끼를 먹은 여우들은 얼굴을 바닥에 문지르거나, 발로 미끼를 긁고, 침을 과하게 흘리는 등 명확한 불편함을 드러냈다. 놀라운 점은 그다음 단계에서 나타났다. 미끼에 매운 성분이 전혀 없고 바닐라 향만 풍길 때도, 여우들은 미끼를 발견한 뒤 이를 섭취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이전보다 훨씬 길어졌다. 이는 여우가 바닐라 향을 고통스러운 기억의 ‘신호’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위험 대 보상' 이론과 행동의 변화
물론 실험에 사용된 미끼의 약 70%가 최종적으로 소비되었다는 점에서 한계도 드러났다. 연구팀은 이를 ‘위험-보상 이론(Risk-Benefit Theory)’으로 설명한다. 여우가 바닐라 향을 통해 잠재적인 불쾌감을 인지하더라도, 고기라는 먹이 보상이 주는 가치가 그 위험을 감수할 만큼 높다고 판단할 경우 결국 먹이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팀은 이번 결과가 매우 고무적이라고 평가한다. 미끼를 먹기 전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 자체가 포식자의 경계심을 극대화했음을 의미하며, 이는 실제 농가 현장에서 여우의 습격 빈도를 낮추는 결정적인 방어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비용·고효율의 윤리적 관리 모델
이번 연구는 단순한 실험을 넘어 야생동물 관리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바닐라 향과 같은 인공 향료는 비용이 저렴하고 환경 오염 우려가 적으며, 인간에게는 거부감이 없다.
IREC 연구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소규모로 진행된 파일럿 테스트 단계지만, 향후 대규모 농가나 멸종위기종 보호 구역에서 유용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살상이 아닌 학습을 통해 인간과 야생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향후 과제와 전망
연구팀은 이번 실험이 제한된 장소와 개체군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만큼, 향후 더 넓은 지역에서 다양한 개체를 대상으로 후속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특히 여우뿐만 아니라 멧돼지, 족제비 등 다른 유해 조수들에게도 동일한 효과가 나타나는지 검증하는 것이 다음 목표다.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인간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과학계의 노력이 '바닐라 향'이라는 달콤한 매개체를 통해 결실을 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