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늑대 보호 등급 전격 하향… 환경 단체 “과학적 근거 없는 정치적 살육” 반발

고용철 기자 / 2026-03-27 05:12:52
‘엄격 보호’에서 ‘보호’ 종으로 지위 변경, 20여 년 만의 정책 회군 40여 개 NGO 연합 “농업·사냥 로비에 굴복한 반과학적 결정” 비판 스페인 등 회원국도 동조 움직임… 생물다양성 보존 vs 축산 피해 구제 ‘격돌’


(C) ecoticias.com


유럽 연합(EU)이 지난 수십 년간 고수해 온 늑대 보호 정책을 완화하기로 결정하면서 국제 사회에 거센 후폭풍이 일고 있다. 이번 결정은 인구 밀도가 높은 유럽 대륙에서 야생 포식자와 인간의 공존이라는 난제를 두고, 환경적 가치보다 농업 및 축산 업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우선시된 결과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에 맞서 유럽 내 40여 개 환경 단체는 이번 조치를 ‘반과학적 퇴보’로 규정하며 강력한 법적 대응과 함께 사살 금지를 뜻하는 ‘쿼터 제로(0)’ 캠페인에 돌입했다.

‘엄격 보호’ 지위 박탈… 늑대 관리의 변곡점
지난 26일(현지시간) EU 이사회와 유럽의회는 늑대의 보호 등급을 기존 ‘엄격히 보호받는 종(Strictly Protected)’에서 ‘보호받는 종(Protected)’으로 한 단계 낮추는 법안을 승인했다. 이는 1979년 체결된 ‘베른 협약(유럽 야생동물 및 자연 서식지 보전에 관한 협약)’에 따른 보호 체계가 가동된 이후 약 40년 만에 일어난 가장 큰 정책적 변화다.

이번 등급 하향의 핵심은 ‘관리의 유연성’이다. 기존 체제에서는 늑대가 가축을 공격하더라도 사살이나 포획이 극히 제한되었으나, 변경된 지위 아래서는 각 회원국이 개체 수 조절을 명목으로 사냥을 허가하거나 유해 조수로서 제거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다.

“데이터 없는 결정은 허구”… NGO의 과학적 반론
환경 단체 연합은 이번 결정이 철저히 ‘정치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고 성토하고 있다. 그린피스(Greenpeace), 세계자연기금(WWF) 등 주요 NGO들은 공동 성명을 통해 “유럽 내 늑대 개체군이 여전히 양호한 보전 상태(Favorable Conservation Status)에 도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EU 집행위원회는 근거 없는 결정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가장 큰 쟁점은 ‘데이터의 부재’다. NGO 측은 EU 집행위가 매년 인간에 의해 발생하는 늑대의 정확한 폐사 수나 개체군 변화에 대한 신뢰할 만한 통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규제를 완화했다고 지적한다. 특히 이번 정책 변화의 근거가 된 보고서가 민간 컨설팅 업체에 의뢰한 외부 용역 결과라는 점을 들어, 투명성과 객관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폰데어라이엔 의장과 농업 로비의 연결고리
환경 단체들은 이번 사태의 배후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을 직접 정조준하고 있다. 폰데어라이엔 의장이 이끄는 집행위가 최근 유럽 전역에서 거세진 농민들의 시위와 농업계 표심을 의식해 환경 정책을 후퇴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유럽농업단체연합(Copa-Cogeca)과 유럽사냥연맹 등 이익 집단들은 이번 조치를 “현실적인 가축 보호를 위한 승리”라며 환영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폰데어라이엔 의장이 개인적으로 기르던 포니(조그마한 말)가 늑대에게 물려 죽은 사건이 이번 정책 변화에 감정적인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제기하며, 공공 정책이 개인적 경험이나 특정 이익 집단의 압력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스페인 등 회원국들, ‘도미노’ 하향 조정 가속화
EU의 정책 기류 변화는 이미 회원국 단위로 확산되고 있다. 스페인의 경우, 지난 2025년 국회에서 두로(Duero)강 북부 지역의 늑대 보호 등급을 낮추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과거 늑대 사냥을 엄격히 금지했던 국가 기조를 180도 뒤집는 것으로, 유럽 전역에서 늑대 보호 완화가 ‘도미노’처럼 번질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스페인 내 축산업계는 늑대로 인한 가축 피해액이 매년 수백만 유로에 달한다며 조속한 개체 수 조절을 요구하고 있으나, 환경론자들은 가축 피해 예방을 위한 울타리 설치나 목동견 활용 등 비살상적 대안을 외면한 채 사살이라는 손쉬운 방법만 택하려 한다고 반박한다.

결론: 공존의 지혜인가, 생태계 잔혹사인가
늑대는 유럽 생태계에서 최상위 포식자로서 사슴 등 초식동물의 개체 수를 조절하고 산림의 자생력을 높이는 핵심종(Keystone species) 역할을 수행한다. NGO들은 “인류가 늑대를 멸종 위기까지 몰아넣었던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려 한다”며, 늑대 사살 허용이 아닌 ‘공존 기술’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 유럽의 환경 단체들은 이번 결정을 유럽 법원에 제소하는 등 법적 투쟁을 예고한 상태다. 이들이 주장하는 ‘쿼터 제로’ 요구는 단순히 늑대 한 마리를 살리자는 차원을 넘어, 기후 위기 시대에 생물다양성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정치적 이해득실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론적 저항으로 해석된다.

유럽 대륙에서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한 늑대의 울음소리가 공존의 찬가가 될지, 아니면 다시 시작될 살육의 전주곡이 될지 전 세계 환경학계와 정책 입안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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