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에너지 주권’ 흔들리나? 신규 자가소비 왕령안 둘러싼 ‘시민 통제권’ 논란

고용철 기자 / 2026-03-02 15:06:26
발레아레스 설치기업협회(Asinem), 정부 초안의 ‘제3자 관리자’ 도입 강력 비판… "유럽연합 에너지 지침 역행 및 독점 우려"


(C) MITECO


스페인 정부가 추진 중인 새로운 ‘에너지 자가소비에 관한 왕령(Real Decreto)’ 초안을 두고 관련 업계와 시민사회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발레아레스 제도의 전기 및 냉난방 설치기업 협회인 **아시넴(Asinem)**은 이번 개정안이 시민들의 에너지 주권을 약화시키고, 거대 자본이나 제3자 기업이 태양광 시설의 의사결정권을 독점할 길을 열어주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1. ‘제3자 관리자’ 도입, 효율성인가 침해인가
이번 논란의 핵심은 공동 자가소비(Autoconsumo Colectivo) 시설에서 새롭게 정의된 ‘자가소비 관리자(Gestor de autoconsumo)’ 항목이다. 스페인 생태전환부(MITECO)가 마련한 초안에 따르면, 공동 주택이나 산업 단지 내 태양광 발전 시설의 운영을 담당하는 관리자 직책을 해당 시설에 참여하는 구성원이 아닌, 외부의 개인이나 법인이 맡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아시넴의 프랑코 모헤르 훌리아(Franco Mójer Julià) 회장은 이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관리자라는 직책은 공동 자가소비 참여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보루여야 한다"며, "당연히 공동체 내부 구성원이 이 역할을 맡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초안은 시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외부 업체가 관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방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와 ‘알박기’ 위험
더욱 심각한 문제는 관리자 선임 및 해임에 관한 세부 규정의 부재다. 현재의 초안은 관리자를 임명하는 절차나 투표권 상한선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아시넴은 이러한 법적 허점이 ‘의사결정의 병목 현상’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특정 시설 내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소수의 참여자가 관리자 교체를 거부할 경우, 대다수의 구성원이 관리 서비스에 불만을 품더라도 이를 시정할 방법이 사실상 차단된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적 에너지 공동체 운영을 저해하고, 사실상 외부 관리 업체가 시설 운영권을 영구적으로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3. 유럽연합(EU) 지침과의 정면 충돌
이번 개정안은 유럽연합의 에너지 정책 기조와도 배치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EU의 ‘재생에너지 지침(RED II, 2018/2001)’과 ‘전기 시장 지침(2019/944)’은 시민들이 에너지 전환의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 주체'로 참여하는 것을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유럽 지침은 시민들이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 소비, 공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며 이를 통해 에너지 독립을 달성하도록 권고한다. 그러나 스페인의 이번 왕령안은 오히려 외부 기업의 개입을 정당화함으로써, 시민들이 자신의 에너지 데이터를 통제하고 발전 수익을 분배받는 과정에서의 '에너지 자치권'을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

4. 잉여 전력 없는 개별 자가소비의 제3자 소유권 문제
아시넴은 공동 시설뿐만 아니라, ‘잉여 전력 미전송(sin excedentes) 개별 자가소비’ 시설의 소유권을 제3자가 가질 수 있게 허용한 점도 문제 삼았다. 이는 실질적으로 소비자가 자신의 지붕 위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에 대해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고, 오직 외부 업체의 에너지를 구매하기만 하는 구조로 변질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모헤르 회장은 "자가소비의 본질은 시민과 산업계가 스스로 에너지 생산자가 되어 전기요금을 절감하고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며, "이러한 권리를 약화시키는 것은 에너지 전환의 민주적 가치를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5. 업계의 목소리: "수정 없는 통과는 불가"
이번 반대 움직임은 비단 발레아레스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페인 전국 설치기업 연맹인 페니에(Feníe) 역시 지난주 생태전환부에 비슷한 취지의 우려를 전달한 바 있다. 이들은 자가소비 시장을 활성화하려는 정부의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대형 에너지 기업들이 관리 업무를 독점하여 중소 설치업체와 일반 소비자의 설 자리를 뺏는 상황을 경계하고 있다.

아시넴은 정부에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자가소비 관리자는 반드시 공동체 내부 구성원 중에서 선출할 것.
투표권의 공정한 배분과 관리자 해임 절차를 명확히 법제화할 것.
시민의 '에너지 데이터 주권'을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할 것.

결론: 에너지 전환의 주체는 누구인가
스페인은 유럽 내에서도 태양광 발전의 잠재력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그러나 이번 왕령안 논란은 에너지 전환이 단순히 '기술적 설비의 보급'을 넘어, '누가 에너지를 통제하는가'라는 권력 구조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에너지 주권은 단순히 전기를 저렴하게 쓰는 것을 넘어, 기후 위기 시대에 시민이 스스로 생존의 기본 요소를 관리하는 민주적 권리다. 스페인 정부가 아시넴과 업계의 경고를 받아들여, 시민이 주인이 되는 자가소비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환경데일리 = 고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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