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데일리 이수진 기자] 집은 집일 뿐이다. 그 이상의 가치를 꿈꾼다면 아마도 지붕이 날아가고 기둥뿌리도 뽑일 수 있다."
"땅끝마을 전라남도 '해남', 고향집 건축 히스토리가 주목을 받기 충분하다.
이유는 크게 3가지다. 63년의 세월에 쌓인 낙엽, 바람, 햇살, 담장 속에 이웃, 해풍, 웃음, 슬픔, 고통, 눈물의 나이테에 고스란히 주춧돌이 쌓여 있다.
지붕에 옷을 갈아입기를 여럿해, 마당은 주인장 내외를 비롯 자식들의 발자국들이 그대로 그대로 스며들어 화석이 됐다.
시골집은 도시의 재건축의 주역인 아파트들은 재산증식, 부동산 투기의 주역이 되는 것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마치 처맛밑에 빗물의 힘과 세월의 바람의 역풍때문에 집을 애워 둘려쌓인 땅바닥은 줄줄이 소시지처럼 송송히 박혀 있다.
그래서일까. 투자의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식들의 유산다툼과 상관없다, 무형 그 자체다.
박영선씨는 2012년 1월 22일 설날. 고향집을 찾아 아버지께 시골집 건축역사와 집안역사를 여쭙고 정리했다고 했다. 돌아가시면 살아질 가족사다. 큰애도 함께 듣게 했다고 했다.
본채는 1955년 아버지 20세 음력 9월 9일 기공해, 1956년 21세 음력 4월 1일 이사들어왔다고 밝혔다.
건축형식은 초기는 볏짚으로 엮은 초가집이였고. 나중에 우진각지붕의 5칸짜리 건물으로 자리잡았다. 순수한 건축면적은 44자*14자(13.3m*4.2m으로 55.9평)다. 꽤나 넓다. 집 뼛대가 되는 대들보를 비롯 기둥에 쓰인 목재는 흑송으로 지게로 져날랐다. 집 구조 설계는 아파트와 전혀다른 다재다능한 박영선씨의 아버지께서 했는데 다른 집들을 보고 불편한 부옄 등은 개선해 짓었다고 했다.
땅끝마을은 따뜻한 남쪽나라다. 그래서 당연히 집 마루까지 깊게 들어오는 햇빛을 위해 좌향으로 가장 잘드는 남남서쪽으로 터를 잡았다.
마을 품앗이는 자연스럽게 작동됐다. 집지을 기초만 동네 사람들이 울력으로 도와주고, 나머지 터는 나무 구르마에 곡괭이로 파서 10년 넘게 기초작업을 했다. 주춧돌은 산, 냇가에서 주워와 놓았다.
목수는 2인이 한달 넘기고 3일 동안 나무 골격만 올렸다. 노동댓가로는 쌀 6섬(5.5kg짜리) 12가마를 지급했다.
창문 문짝은 목수 2명이 한달 정도 별도로 잘라서 직접 짰다.흙벽인 심벽 흙질은 한사람이 한달 소요됐는데. 작업은 대나무에 새끼를 감고 황토흙과 볏짚을 섞어 벽체 발랐다. 이 작업 노임으로 나락 두섬에 석섬 갚은 조건으로 융통했으나 정확한 건축비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처음 지붕을 올릴 때 동네사람이 울력나와 이웃을 도왔다. 1977년(10살) 본채 초가를 (석면함유)슬레이트로 교체. 그당시 나락 10섬(55kg 20가마) 들여서 보조없이 했다. 같은해 1977년 현 사랑채를 신축했고, 이듬해 8월 창고건물 신축, 그 겨울, 고샅을 현위치로 바꿨다.
그리고 세월이 흘려 1994년 부엌개량(600만원 자부담 100%)했고 2010년 4월 한달 동안 마침내 59년만에 수세식 화장실을 증축했는데 200만원(120만원 보조)을 투자했다. 7년 전인 2011년 9월 현대식으로 지붕개량을 위해 100% 자부담(800만원)을 투자했다.
박영선씨는 "시골집 앞으로 100년 더 존재할 수 있도록 후세에게 잘 보존하도록 하겠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집의 가치는 재산의 목적이 아닌 사람과 자연과 공존하는 생물과 같은 존재다.